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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열사 백락관
구분 역사인물
내용 독립(獨立)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烈士) 백락관(白樂寬)

백락관(白樂寬)은 호는 추강(秋江)이며 본관은 남포(藍浦)로서 헌종(憲宗) 12년(1846)에 보령시(保寧郡) 주산면(珠山面) 오상동(五相洞)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관찰하는 눈이 날카로웠으며 천성이 또 강직해서 헛된 일을 하지 않았으며 도량이 넓어서 어지간한 일에 동요도 하지않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부러워하는 것이 없었고 배움이 또한 깊어서 타고난 인재라는 평판이 높았다. 나라가 돌아가는 모습이 점점 어지러워지자 그는 집을 떠나선 산과들을 찾아 견문을 넓혔으며 검소하게 살며 가난한 생활을 궁핍하다 하지않고 모름지기 뜻한바 있는 듯 밤늦게까지 책을 읽으며 또한 낮에는 집에 있을 때는 부지런히 일도 하였었다.

남과 어울려도 가끔 하는 말이 나라위해 백성이 있으니 백성은 나라가 어지러움을 남의 일처럼 생각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고 오직 나라위해 사는 사람만이 이나라의 백성이라 말하여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었다 한다. 부모에게의 효도는 누가 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식된 자로서의 도리이니 즉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않는 백성은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하였다. 더구나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백성편에 서서 백성을 나라 사랑하는 편으로 인도해야하며 자기를 위한 벼슬아치들의 치부는 백성이 용서할수 없는 처사라고도 말하였다.

고종(高宗 14년(1877) 일본의 화의조약(和議條約)이 맺어지자 그는 나라가 차츰 어려
운 고비에 놓이게 됨을 개탄하면서 백성들에게 나라를 지킬 것을 호소하고 다녔다. 나라가 어지러워져도 관원들이 나라 기우는 것을 보고서도 무성의 하게 있음을 반박하면서 백성들에게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의 우리 백성들이 싸운예를 들면서 우리나라는 우리 백성이 주인이니 우리가 지키자고 외쳤었다.

고종(高宗) 19년(1882)엔 일제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침투해오자 고종황제(高宗皇帝)께 일제의 군사를 몰아내달라고 상소하였으며 잘못하다간 이나라의 사직(社稷)이 무너진다고 상소하였으나 아무런 대책이 보이지않고 더욱 왜인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자 이번에는 남산(南山)에 올라가 봉화(烽火)를 올리며 왜구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외치다가 잡혀서 반역자란 누명으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한나라의 백성이 나라가 위급하니 왜구를 몰아내 달라고 호소한 것이 반역자라니 참으로 억울한 일이지만 그는 옥살이를 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오적(五賊)을 없애야 한다고 외쳤었다.

그는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옥에서 구출이 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어 제주도(濟州道)로 유배되었다. 진정한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기치를 높혔다가 대마도(對馬島)로 제주도(濟州道)로 유배될 때였다. 그는 제주도(濟州道)에서 유배되면서도 왜구를 몰아내야 한다고 왜치니 그를 감시하는 관원들도 공감은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죽을 때 자기의 죄를 빌기 마련인데 자기의 죄중에서 가장 큰 죄가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으나 그것을 생각한다고 한다. 사람을 부리는자 권세에 오른자들의 행실의 값은 얼만큼 나라에 정성을 바쳤는가 또는 얼마만큼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사랑하였는가로 자기의 옳고 그릇된점을 반성한다고 한다.

그는 그래서 말하기를 당신들이 먹고사는 돈이 누가 주는 돈인가 백성이 주는 돈이 아닌가 나라가 주는돈이 아닌가 나라가 당신들을 먹여살리는데 그 나라가 없어질려는데 어째서 방관만 하느냐고 말하기도 하였었다. 그는 6개월간 제주도(濟州道)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오게되자 다시 서울로 상경해서 왕을 뵈옵고 대의로서 이조 500년의 사직이 무너지는 이 순간을 어째서 대왕은 보고만 있느냐고 말하며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나라잃고 헤메는 꼴이 눈앞에 선하다고 진정으로 호소하였으나 그는 잡히는 몸이 되어 그해 8월 29일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바른 말을 하는 자를 싫어한다고 자기만의 영화를 위해서 한일합방에 앞장섰던 오적(五賊)이 이 나라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조용히 눈을 감은 백락관(白樂寬)은 차분하고 나라를 아끼다가 숨진 위대한 애국자다. 그가 죽음으로써 이 나라의 우국지사들은 더욱 흥분하나 힘을 기르지 못하고 단합이 안되는 기질에서 각기 혼자서만 슬퍼하니 어찌보면 불행을 혼자서 안고 숨진 선구자(先驅者)가 아니랴.

주산면(珠山面)엔 그 후 독립투사가 많이 배출되는데 모두가 곧은 성격으로서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는 우국의 일념에서 희생도 달게 받으니 모두가 백락관(白樂寬)같은 경지에서 쌓은 나라의 횃불로 승화된다고도 말한다.

백락관(白樂寬)은 위대한 애국자요. 만세의 열사이다 옛말에 충신의 상여에 무지개 돋는다. 했는데 공의 관위에도 무지개가돋고, 그의 기적비 건립 시에도 또한 그러했으니 어찌 하늘의 감응이 헛되다 할 것인가. 보령 5열사중 으뜸가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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